거제로 가는 길. 열차 안에서 읽은 책 한 구절이 눈에 밟힌다.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 누가 지구를 망치는가 > 저자 반다나 시바는 1970년대 인도 칩코chipco 운동에 참여한 일을 회상하며 인간과 비인간이 지구공동체임을 강조했다. 칩코는 히말라야 지역에 대규모 벌목을 앞두고 숲을 보호하기 위해 지역 여성 농민들이 벌인 비폭력운동으로, 칩코는 ‘껴안다’, ‘끌어안다’는 뜻이라고 했다. 벌목을 하려면 나무를 끌어안은 여성 농민을 죽여야 했다. (인도 정부는 10년이 지난 뒤 벌목을 금지했다.)
파업중인 하청노동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교섭 타결 소식이 들렸다. 공권력 투입으로 일촉즉발 상황에 마음 졸이던 터였고 그냥 있을 수만은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거제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숲을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나무를 껴안은 여성 농민들처럼, 대규모 벌목과도 같은 공권력 앞에 선 하청노동자들 편에, 이대로 살 수는 없다는 외침에, 마음을 보태겠다는 사람들을 따라온 거였다. 그 길에 들은 소식은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다행스러운 소식에 마음을 쓸어내렸다.
거제에 도착해 시야와 함께 옥포 조선소 서문으로 갔다. 조선소로 들어가는 작은 다리 위에는 찢겨진 현수막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다리 끝에는 내일 있을 희망버스 현수막이 크게 걸려 있었다. 정당 천막은 사람들이 모두 가고 비어 있었고 서문 앞에는 퇴근하는 사람들만 종종 보였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어 서성거렸다. 텅 빈 거리에 서 있으니 타결 소식을 조합원 마음이 어떨까, 내일 희망버스는 어떨까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어떻게 해야 하나 두리번거릴 때 조끼를 입은 사람이 눈에 띄었다. 붙임성 좋은 시야가 성큼 다가가 알은체를 하는데, 노조 사무국장 이김춘택씨였다. 반가운 마음에 한껏 목소리가 커진 시야가 고생하셨다는 말을 전했다.
▲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사무실(출처: 싸람)
사무국장을 따라 사무실에 들어가니 노조 집행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로 얼굴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수고했다는 말을 주고 받는 이들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지기도 했다. 집행부는 내일 있을 희망버스 준비에 바빠 보였다. 구호는 어떻게 할 건지, 인터뷰는 누가 할 건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더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사무실에서 나왔다. 서로 웃는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보고 따라 웃다 보니 거제에 오기를, 사무실까지 따라 들어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에서 나와 시야와 함께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에 다시 그 벌목을 앞둔 숲을 떠올렸다. 다행히 인도 정부는 벌목을 금지했고 여성 농민이 벌인 칩코 운동은 승리했다. 물론 숲을 살리겠다고, 강을 지키고 지키겠다는 운동은 칩코만이 아니고, 모든 저항이 칩코처럼 승리한 것도 아닐 거다. 아마도 살아남지 못한 숲과 강과 갯벌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을 거다. 지키고자 했으나 지키지 못하고 사라진 그곳을 보게 된다면, 아쉽고 허탈하고, 또 화가 날 게 분명하다. 그러나 나무가 잘려나간 그 자리는 그냥 텅 빈 곳이 아닐 것이다. 그 자리를 볼 때 나무를 끌어안은 사람들이 함께 보일 것이고 그들이 불렀던 숲의 노래가 들릴 것이 분명하다. 그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옥포 조선소 근처 아주천을 걸었다.

▲ 7월 23일 토요일 오전, 조합원들이 농성장을 정리하고 있다.
누구는 짐을 나르고, 누구는 젖은 현수막을 말렸다. 어떤 조합원들은 농성장 지붕에 올라 작업을 하고, 도크게이트는 몸짓 연습에 정신이 없었다.
희망버스를 기다리며 농성장을 재정비하는 조합원들의 얼굴이 밝아보였다.
김형수 지회장은 이제 ‘쎄게 말 안해도 돼서 좋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출처: 싸람)
나는 싸우는 노동자를 볼 때마다 늘 생각한다. 싸워주셔서 고맙다고.
‘법과 원칙’의 보호까지 받는 거대하고 단단한 자본의 벽 앞에서 망치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여의도에서 9일간 단식농성을 한 강봉재 조합원은 끝장 투쟁을 시작한 이유를 들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다 받아들이겠다고.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청 노동자 150명 투쟁에 대통령을 움직이지 않았느냐고. 맞다. 서울에서 400km 떨어진 거제, 그 먼 곳에서 150명 하청 노동자의 총파업으로 전국이 뒤집혔다. 그들이 든 망치로, 그 깨진 틈 사이로, 하청 노동자의 세상이 보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투쟁하는 노동자의 승리다. 저항하는 삶 자체로 이미 승리한 거다.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51일 투쟁은 더 많은 저항을 만들어내고 더 단단한 망치를, 더 커다란 틈을 만들어낼 것이다. 누구도 죽지 않은 51일 파업 투쟁이 그저 감사하다.

▲ 51일 파업 타결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조선소 하청지회는 ‘돈보다 조직’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임금인상만 승리가 아니다. 끝까지 살아서 함께 투쟁하는 게 승리다!
▲ 희망버스를 타고 와서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서로 축하하고 응원하는 내 지구공동체 동지들. 살아서 투쟁하며 세상을 뒤집을 이들의 웃는 얼굴에 마냥 가슴이 설렌다. (출처: 싸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