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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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안이라는 사람이 열어준 길
2편. 슬픔의 강을 건너가는 법
2026. 2.
고태은 기록


*이 기록은 사람이왔다_이주노동자차별철폐네트워크 소속으로 지난해 10월 28일 강제단속에 희생된 미등록 이주노동자 뚜안 투쟁에 함께 했던 개인적인 소회입니다. 뚜안님의 명복을 빕니다. 


베트남 사람으로 뚜안을 보내는 길

아버지와 어머니는 뚜안보다 조금 더 일찍 한국에 들어와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일용직으로 용접일을 하시고, 어머니는 천을 만드는 공장에서 낮시간 유일하게 일하는 노동자다. 뚜안은 그런 두 부모님의 도움으로 한국에서의 생활에 점차 적응해갔다. 반대로, 열심히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 공부를 해온 뚜안의 지식들은 부모님께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필요한 물건을 찾아 사오는 일,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한 한국말을 알려주거나 대신 일을 처리하는 일.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뚜안은 참으로 따듯하고 성실한 딸이었다.


그런 딸의 마지막을 베트남식으로 보내주는 것이 부모님의 소원이었다. 장례의 마지막, 뚜안이 죽은 공장을 돌며 뚜안의 영이 길을 잃지 않도록, 부르는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영상은 참 아렸다. 49재까지 근처 절에서 기도를 올리고,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에서 열었던 산재피해자 합동장례식 당시에 잠깐 생긴 틈에도 기도를 올리려 법당으로 향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 부모가 뚜안의 49재는 꼭 베트남에서 지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투쟁을 시작하면서 그 마음을 꼭 지켜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진심과는 달리, 상황이 그렇게 되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었다. 


12월 29일 첫 청와대 앞 릴레이 108배를 마친 뒤 참여자들과 근처 카페에서 몸을 녹였다. 아버지는 49재에 베트남에 가서 뚜안을 보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지만 그게 다 우리를 만나려고 그랬던 모양이라고. 뚜안의 마지막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주다니 뚜안은 참 복이 많은 아이라고 했다. 비극같은 일을 두고도, 오히려 함께 하는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아버지의 말씀에 마음이 울렁였다. 베트남에서는 49재 후에 100일재를 올리니 그 때에는 꼭 베트남에 가고 싶으시다는 말씀에 그를 두 번이나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12월 31일의 법무부의 사과가, 1월 2일과 9일의 농성 해단식이 반가웠다. 남은 투쟁을 결의하며, 드디어 뚜안의 애도가 현재의 몫이 된 것 같아서.


애도의 길에 오르다

1월 2일 농성단 해단식을 하며, 동지들에게 베트남에 가자고 했다. 말은 꺼냈지만 2월 일정과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아서 쉽사리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많은 고민 끝에 뚜안님의 1주기 때에는 꼭 베트남을 가리라 마음먹었다. 지금은 당장 해야할 일들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매일 아쉬운 마음에 호치민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찾아봤다. 사람이왔다_이주노동자차별철폐네트워크 집행위 회의에서 성서공단지역지회의 김희정, 윤다혜 두 동지가 100일재를 따라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날 김희정 동지가 내게 같이 가지 않겠냐는 전화도 주셨다. 돈은 본인이 무이자로 빌려주겠으니, 시간만 내어보라며. 감사하지만 정말 쉽지 않다고 이야기 했더니, 좀이따 다시 전화가 왔다. 아버지께서 내 경비를 내줄테니 같이 가자고 하셨다고. 순간,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스쳤다. 염치불구하고 100일재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뚜안의 100일재를 함께 보내는 것이 필요했다. 운동을 함께하다보면 돌아가신 이의 가까운 가족과 동료들을 통해서,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이를 알게되는 시간들이 있다. 20대 여성 노동자의 얼굴을 한 뚜안의 죽음은 내게 너무 가까운 죽음으로 와닿았고, 그 젊은 부모님의 진심어린 마음들과 신뢰를 느낄 때면 더욱 그 죽음이 아깝게 느껴져서. 뚜안이라는 사람을 애도하는 시간을 통하여 충분히 기도하고 보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베트남 원정에 올랐다. 먼 길을 가는 동안에 투쟁에 연대해주셨던 연대자 살미님, 장례때부터 기록해왔던 뉴스민 박중엽 기자님이 함께 했고, 먼저 베트남으로 넘어간 성서공단지회의 두 동지까지. 뚜안 어머니의 7년만의 귀향길이자, 100일재를 올리는 날에 맞춰 함께 호치민행 비행기를 탔다.


애도하는 마음

겨울을 한창 지나고 있던 한국과 달리 호치민은 30도 정도의 날씨였다. 비가 잘 오지 않는 계절이라고 했는데 그만큼 날이 화창하고 건조했다. 저녁에는 조금 선선하고, 낮은 조금 더운 날씨. 투쟁을 하며 어머니 아버지가 건넨 뚜안의 사진마다 꽃이 있었다. 뚜안의 외할머니와 외가 식구들이 꽃집을 해오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뚜안이 꽃을 왜 좋아했는지 알 것 같은 도시였다. 따뜻한 기후가 꽃에 담겼다. 


아버지가 잡아주신 집 근처 숙소에 짐을 풀고 걸어서 뚜안네 집으로 이동했다. 호치민의 뚜안네 집은 작은 골목의 맨 안쪽에 위치했다. 문 밖에는 손 타는 고양이들이 걸어다니고, 강아지가 바닥에 등을 긁으며 누워있었다. 처음 만난 뚜안의 외할머니는 우리를 웃으며 반겨주셨다. 우리는 같이 2층 뚜안과 동생들의 공부방에 놓인 3대의 가족들을 모신 제단과 뚜안의 작은 제단 앞에 서서 인사를 올렸다. 붉은색 카세트에서는 불경이 흘러나오고, 제단에 올린 향들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대구 출입국사무소 앞 뚜안의 영정 앞에 놓였던 ‘뚜안아 사랑해’라고 수놓인 천과 꽃이 놓여있었다. 곧이어 뚜안의 어머니와 다른 동지들이 도착했다. 7년만에 호치민에 돌아온 딸이 자신의 딸을 잃고 돌아온 데 큰 슬픔을 느낀 두 엄마의 울음에 다른 사람들도 함께 울었다. 


뚜안의 100일재는 이틀 동안 두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 100일재는 집 근처에 뚜안의 유골을 모신 절에서 보냈다. 뚜안의 집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걸어서 절까지 가는 길에 시장에 들러 노란 국화를 샀다. 한국에서는 흰 대국이 추모를 상징하지만, 베트남에서는 추모를 상징하는 꽃이 노란색이라고 했다. 마침 설을 맞이하여 길가에는 노란 꽃이 가득했고, 그 길을 걸어 우리는 뚜안을 만나러 갔다. 사찰은 관세음보살상이 가장 크게 모셔진 곳이었다. 불교에서 속세의 고통을 보고 들으며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관세음보살의 인자함이 느껴지는 절이었다. 법당에서 한 번 재를 올리고, 뚜안의 유골을 모신 절 내 납골당에서 다시 한 번 재를 올렸다. 재를 마친 후, 뚜안의 부모님은 상 위에 놓인 과일을 하나씩 입에 넣으며 뚜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 또한 어머니가 쥐어준 용과를 먹으며 뚜안님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식사에, 먼길을 잘 떠나라는 인사를 남겼다. 


두 번째 100일재는 집에서 보냈다. 이날은 동생 득안도 학교 수업을 가지 않고 누나의 재를 함께 했다. 기도를 하러 모인 뚜안의 가족들이 방을 가득 채웠다. 베트남어로 진행된 기도와 재의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기에 그 공간에서 오롯이 추모의 마음을 느낄 수 있기도 했다. 49재가 죽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날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라고 지내는 제사라면, 100일재는 심판을 받을 때 좋은 판결을 받아 더 좋은 곳에서 환생하라고 올리는 재라고 하셨다. 뚜안의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며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 뜻을 생각하며 이제는 조금 더 차분한 마음으로 뚜안이 더 좋은 곳으로 가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


반기는 마음

처음 호치민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뚜안에게 인사를 시켜준 다음으로 한국에서 투쟁하며 찍은 사진들을 모아서 4절지 사이즈의 판에 인쇄한 액자를 보여줬다. 스님들과 크게 찍은 사진들은 베트남에 남기고, 투쟁하며 ‘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한국으로 보내실 예정이라고 했다. 100일재를 함께하러 친척들과 지인들이 방문할 때마다 액자는 한국에서의 삶을 소개하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한국에서 보냈던 어려운 날들에 큰 도움을 준 사람들이라며 동지들의 얼굴을 짚어 소개도 하고,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집회에 참여해서 남겼던 사진은 한국에서 베트남 사람들이 이렇게 함께 싸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됐다. 


100일재 당일에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며 아버지는 우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뚜안을 잃은 것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그 덕에 우리를 만나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아마 그 말은 호치민에 온 우리가 아니라 한국에서 이 투쟁에 마음모아주었던 모두를 향해 건네고 싶은 인사였으리라. 그 인사에 대한 화답으로, 김희정 동지는 앞으로 한국에서 베트남 이주노동자들과 투쟁하는 데 아버지께서 역할해주시리라 믿는다는 인사를 전했다. 아버지는 웃으며 그렇게 하겠노라 답했다. 뚜안 투쟁이 마무리 되고, 아버지는 금속노조 성서공단지역지회의 조합원이 되셨다. 투쟁을 하는 동안 서울과 대구에서 무수히 많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고, 비정규직 이제그만의 노동자들의 점거농성장에서 함께 집회를 들으며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동일한 목표를 공유합니다’라는 감상을 공유하던 우리는 정말로, 동지가 된 것이다. 


뚜안의 어머니는 공장의 유일한 주간시간 대의 노동자라고 했다. 쉬는 날도 없이 혼자 50여개의 기계를 봐야한다고. 그런 어머니가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 때문에 일용직으로 일하시는 아버지가 외부 활동을 도맡아 하셨지만, 함께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애정과 운동하는 이들에 대한 신뢰는 아버지만큼이나 크고 강했다. 어머니는 뚜안과 같은 유학생들이 미등록 상태로 노동을 하고 그러다 죽음으로 이어지는 문제에 대하여 함께 분노하고, 뚜안의 죽음이 헛되지 않는 길은 계속 싸워 제도를 바꾸는 것이라고 수차례 이야기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뜻을 같이할 거라는 이야기도. 아버지께 이 이야기를 전하자 ‘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며 웃었다. 


여전히, 그리고 새롭게 애정하는 마음

뚜안의 집에 가고서야 알았다. 뚜안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애정으로 키워졌는지. 뚜안의 아버지, 어머니가 쉼없이 일하는 동안, 뚜안의 곁에는 동생 득안과 사촌동생들, 외숙모, 외할머니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뚜안의 이야기를 하는 숙모의 말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한국에서 간, 베트남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손님들을 부족함 없이 먹이고, 재우고, 좋은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길을 나서는 아버지 옆에는 뚜안의 동생 득안이 있었다. 득안은 이제 막 대학생이 되었고, 학교생활이 바쁜 와중에도 밤늦게까지 일정을 함께 해주었다. 집에서는 외숙모와 할머니의 음식에 더 못 먹겠다는 말이 나올때까지 먹고, 밖에 나와서는 아버지와 득안의 도움으로 호치민의 거리를 걷고 시원한 음료를 마셨다. 중간에는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들과 형도 합류했다.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 중 훙님은 우리가 떠나는 날 자신의 집으로 점심식사 초대도 해주셨다. 처음 가 본 거리,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매일이 마치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난 사람들처럼 반갑고 따스하게 받아주셨다. 내가 추모하고 애도하며 위안을 함께 만드려고 갔는데, 돌아올 때에는 그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애정에, 한국으로 가는 길을 다시 떠나기 어려울만큼 마음이 쌓였다.


부뚜안이라는 사람을 만나, 떠나보내게 되는 과정이 내게는 이별부터 시작한 과정이었다. 그를 떠나보낸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가 얼마나 사랑이 많았고, 사랑을 많이 받았던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빌려서, 나 또한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됐다. 너무 짧은 삶을 살았던 그가 떠나는 길에, 나는 그의 가족들을 새로운 가족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베트남 가족들과 소통을 할 때면 AI 어플을 통해 번역을 돌려야 하는데, 이를 통해 전하는 나의 메시지에 뚜안의 ‘엄마’를 ‘엄마’로 부르는 게 마음에 걸린다는 후옌님과 긴 이야기 끝에, 나는 그를 앞으로도 엄마라 부르기로 했다. 뚜안을 대신할 수도 없고 그러지야 못하겠지만. 가족으로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은. 서로를 응원하고 애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이 아닌 삶의 길이 됐다. 뚜안이 이어준 사람들이 서로를 동지로 여기며 함께 세상을 바꾸는 것 만큼이나. 슬픔의 강에 빠지지 않고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이 됐다. 

*섬네일 출처: 뉴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