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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안이라는 사람이 열어준 길
1편. 그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2026. 2.
고태은 기록


*이 기록은 사람이왔다_이주노동자차별철폐네트워크 소속으로 지난해 10월 28일 강제단속에 희생된 미등록 이주노동자 뚜안 투쟁에 함께 했던 개인적인 소회입니다. 뚜안님의 명복을 빕니다. 


나와 닮은 뚜안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삶

뚜안은 2000년생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여성 노동자였다. 딱 1년 전 2025년 겨울, 뚜안은 대구 계명대학교를 졸업했다. 뚜안은 베트남 호치민에서 외가 식구들과 살다가 한국에 유학을 왔다. 2019년에는 어학당을 다니고, 이어서 바로 대구계명문화대학교를 졸업하고 편입했던 계명대학교 학사까지 마친 것이었다. 관광경영학과를 나온 그녀는 3월 경, 구직비자로 변경 후 일을 찾기 시작했고 10월에는 대구 성서공단의 SJ오토텍이라는 자동차부품 생산 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이 아닌 다른 노동을 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어쩌면 요즘같은 취업난 속에서 전공을 살려 취업에 바로 성공하는 것이 드문 일일지도 모른다. 특히나 이주민이었던 뚜안이 전공을 살려 바로 취업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뚜안이 일을 바로 해야했던 찾았던 이유는 또 있다. 그에게는 더 이어가고 싶었던 학업의 길이 있었다. 대학원 진학을 두고 두 부모님과 진지하게 이야기 나눠왔다. 한국에서의 생활과 대학등록금을 들여 공부를 하는 것은 하루 하루 벌어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버거운 것일지라도 가치있는 것들이었을 것이다. 뚜안은 그렇게, 졸업 후 미래를 꿈꾸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등록금도 모으면서 ‘우리’와 닮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당연한 일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였다. 뚜안이 가지고 있던 D-10비자는 유학생들이 졸업 후 구직할 때에 받는 비자로, 취업을 허가하는 비자이다. 그러나 전공과 관계 없는 노동에 대해 강하게 규제하고 있었다. 법적으로 정해진 기준 안에 들어오는 업종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서만 일해야 했고 그게 아니면 모두 불법이 됐다. 한국의 생활비와 미래도 꿈꾸는 그에게 미등록의, 그림자 노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음에도. 한국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낙인찍고 공장에서 그와 닮은 사람들을 잡아갔다. 



10월 28일, 예견된 죽음의 반복

그날 공장에서는 39명의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다 잡혔다. 그중 일부는 귀화자거나, 노동이 가능한 비자가 확인되어서 당일 공장에서 풀려났지만, 일부는 하루 이상 구금되어 갇혀있었고, 그중 10여 명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리고, 뚜안은 본국으로도 돌아가지 못했다. 오후 3시 전부터 시작된 공장 내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은 장장 3시간에 걸쳐서 단속반원이 계속 그 공간에 머물며 노동자를 찾았다. 단속반원이 나가고, 뚜안이 나오지 않자 오후 6시 28분 함께 일하던 베트남 언니가 뚜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단속반이 다 나갔으니 밖에 나와도 된다는 말에 ‘네 알겠어요’라고 작게 대답했다. 그러나 잠시 뒤 뚜안은 3층 높이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그날 현장에서 단속을 겪었던 노동자들의 증언처럼, 명단을 든 단속반원들이 ‘여자 *명, 남자 *명 남았다’고 소리를 지르며 찾아다니지 않았다면. 3시간에 걸친 아주 긴 시간의 단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살아있을까. 아니, 경주에서 열렸던 APEC이 성공적으로 개최되기 위해서라며 지역 집중 단속을 하지 않았다면, 윤석열 정권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불법체류자 감축 5개년 계획’이라며 미등록 강제단속제도를 강화하고 지역별로 할당하고 이런 실적압박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애초에 강제단속 제도가 시행되던 2003년을 전후하여 단속이 무서워 집에서 나오지 못해 죽었던 이주노동자들, 자살'당한' 미등록의 존재들과 연결된 그 날의 죽음은 이 ‘가정’이 아주 힘없는 가정일 뿐이고. 우리의 현실은 비극에 더 가까운 필연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날을 되짚어보면, 우리는 그 폭력과 비극의 순간이 올 줄 알았던 사람들 같다. 그 날은 전국에서 APEC 성공개최를 위한 정부 합동단속 공지에 분노한 많은 이주노동, 인권 활동가들이 전국의 출입국 사무소 앞에서의 피켓팅을 한 날이었다. 강제단속이 희생을 만들고 있으니 이를 멈추란 목소리를 냈던 날이었다. 대구출입국사무소 앞에는 오전 8시 반부터 경북북부이주노동자센터, 이주와가치, 성서공단지역지회, 이주민건강권동행 등 네 개 단위가 돌아가며 릴레이 1인시위를 이어갔다. 아침 선전전을 마치고, 다른 강제단속 피해 노동자를 만나러 창원에 넘어갔다 돌아오던 길, 성서공단에 강제단속이 나왔고 그로 인하여 20대 여성 이주노동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성서공단지회 활동가들이 느꼈을 분노와 절망의 깊이를 알 길이 없다.


‘낯이 두꺼운 사람’들과 동지가 되다

뚜안의 100일재를 치르던 날, 금속노조 성서공단지역지회 김희정 지회장은 내게 웃으며 ‘장례식 때 우리 보고 아버지가 우리가 참 낯짝도 두껍다고 생각했대요’라고 말했다. 성서지회 사무장이자, 베트남 출신 활동가 윤다혜 동지에게 나는 그게 베트남에서는 무슨 뜻인지 물었다. 얼굴이 두껍다는 말은 한국에서는 부끄러움 모르는 사람을 말하지만, 베트남에서는 꼭 나쁜 뜻만은 아니라고 말해줬다. 배포가 좋다는 의미기도 하다는 것이다. 나는 유족들이 대구경북지역의 동지들을 꼭 그렇게 느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도 모르는, 한국인들이 찾아와 장례 내내 자리를 지켰다. 장례 기간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스님들의 재는 불심이 강한 가족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이전에 만나본 적 없었던 사람들이 내내 그들을 찾아 손을 잡고, 같이 울고, 같이 하였다. 장례를 마치자 유족은 김희정 지회장에게 당신들이 하자고 하면, 뭐라도 하겠다며 위임장을 작성했다. 그렇게 뚜안대책위 투쟁이 시작됐다. 


그렇게 시작한 투쟁은 대구출입국사무소 앞에서 분향소를 차리고,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지금 와서는 아쉽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분향소는 정리하는 날 딱 하루 가본 것이 다였다. 그러나 뚜안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대구 출입구사무소 앞에서만 있지 않았다. 서울의 세종로출장소 앞에서 매주 추모문화제가, 매주 수요일마다 전국의 출입국사무소 앞에서 이어진 1인시위가, 이 죽음을 우리의 죽음인냥 슬퍼하고, 함께 공감하며 한국을 울렸다. 뚜안의 부모님이 건네준 뚜안의 영정은, 우리와 얼마나 닮은 이였는지 느끼게 했다. 길을 걷다가 어디에서나 보일 것만 같고, 카페에서도 맛있기보다 예쁜 디저트를 시켜놓고 사진을 찍으며 서로 확인하며 웃을 것만 같은 모습이 눈에 선한. 그런 이의 대학 졸업 사진과 카페에서 찍은 사진이 영정이 되어 우리의 손에 들렸다. 


11월 30일,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서 오체투지를 하던 날 나는 유가족을 처음 만났다. 웃지 않는 얼굴, 작고 까맣고 단단한 표정을 가진 사람. 부반숭님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었다. 이주노동자 오체투지에 함께하는 그에게 우리는 뚜안의 영정을 안고 걸으시라 권했다. 아버지는 거절했다. 기자회견 때, ‘발언 대신 절로 나의 마음을 대신 표현하겠다’고 하셨다. 절을 하며 읍소하는 투쟁은 하기 싫던 내가 그 걸음과 절에 울면서 그 길을 같이할 수 밖에 없었다. 나뿐이랴. 부반숭이란 사람에게는 한국어보다 더 익숙하고 솔직할 수 있는 언어가 절이었으리라.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서울의 아스팔트 길에 삼보일배를 시작했다. 


그 뒤, 그를 만난 것은 뚜안의 49재를 즈음한 때였다. 대구경북지역의 노동, 이주, 인권 단위들이 모여서 만들었던 “이주노동자 ‘뚜안’ 사망사건 대책위(故 뚜안 사망사건 진상규명과 강제단속 중단을 위한 대구·경북지역 공동대책위원회)”는 대구 출입국사무소 앞에서의 농성을 이어가며 서울 상경투쟁을 결의했다. 당시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은 천막 하나 세울 수 없는 곳이었다. 먼저 농성장을 친 동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람 몸 하나 숨길 공간 만들고, 밤에는 전기매트 하나 몰래 켜서 버티고 있다고 했다. 뚜안대책위 동지들은 뚜안의 49재는 베트남에서 보내주고 싶다던 부모님을 지금은 투쟁을 멈출 수 없다 설득했다. 결국, 뚜안의 유골은 뚜안의 삼촌과 친구, 남자친구의 손에 들려 본국으로 돌아갔고, 아버지는 투쟁을 이어갔다. 뚜안의 삼촌은 그날 용산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대통령은 책임져라”라는 플랑을 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발언하는 모습을 보며,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에게 그 사람들을 믿고 투쟁해도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용산 앞 농성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걸음했다. 요즘은 농성장이 농성을 하고, 농성장이 마치 쉬는 공간처럼 규율없이 운영되는 곳이 많지만. 그 짧은 시간 유지되던 농성장은 마치 이 투쟁을 포기하지 못하고 상경투쟁까지 벌린, 농성단과 이주노동 운동가들의 성품을 닮은 듯 정갈하고, 원칙적이었다. 금속노조 성서공단지역지회 김희정 지회장, 경주이주노동센터 이춘기 소장, 경북북부이주노동자센터 김헌주 대표, 민주노총 대구본부 이길우 본부장 네 사람이 끝까지 농성장을 지켰고, 초반에는 민주노총 경북본부 최해술 부본부장이, 마지막에는 유가족이신 부반숭 님이 함께 농성장을 지켰다. 아버지도 뚜안의 영정을 세운 그 추운 농성장서 세 밤을 잤다. 춥지 않으셨냐 물으면 웃으며 주머니에서 다른 동지들이 찔러넣어줬을 핫팩을 꺼내어 다른 이의 손에 쥐어주던 그 얼굴이. 나는 가끔 사무치게 슬펐다.


뚜안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 포기는 할 수 없던 사람

가끔 투쟁을 함께하다보면, 이 운동이 이기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차오를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비해 우리의 한계를 느낄 때면 마음이 한없이 무너질 때가 있다. 투쟁을 하며 이 운동은 지난 30년 가까이 이주노동 운동을 해온 선배들의 염원과, 보이지 않았던 헌신이 지금 결실로 조금씩 맺히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운동이 대체 뭐길래 운동한다는 사람은 이렇게 많은데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은 없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우리의 운동이 이만큼 온 것은 동지들의 헌신과 진심 덕분이고, 우리가 이만큼밖에 갈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실력 부족과 정세 때문이라는 생각을 매일 곱씹었다. 당신들을 믿고 뭐든 하겠다는 유족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았지만 매일 부끄러웠다. 


그런 마음이었을까. 12월 23일 진상조사 중간결과발표회에서 성서공단지역지회 조합원 박영주 님이 ‘자신들은 한국이 밉고, 그런 마음으로 본국으로 돌아가지만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버리지 말라’는 말을 했을 때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 다음주 12월 29일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108배에도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를 믿고 싸우자고 해놓고 유가족의 절을 시작으로 하는 투쟁을 한다는 게 부끄럽고 서러웠다. 같은 마음으로 사회를 보았을 이춘기 소장님의 말이 계속 길어졌다. 이 절은 대통령에게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신께 올리는 절이라고. 뚜안의 죽음에 대한 사과를 하고, 단속 제도를 중단시켜야 할 책임자인 한국 정부에 우리는 계속 맞설 거라고. 통역을 해주시던 윤다혜 동지의 말을 통해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들을 계속 전했다.


“제 딸아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애써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12월 31일 뚜안님의 죽음에, 대구출입국소장이 고개 숙여 유족에 사과했다. 사과는 개인적 사과가 아닌 대한민국의 법무부라는 행정기관의 대표 사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고, 법무부는 설명했다. 아버지 부반숭님께 대구출입국소장이 고개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뚜안의 어머니 후옌님께 보냈다. 어머니는 그가 고개숙여 사과하는 모습에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며 함께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겼다. 그리고 마지막 말로, 다시 한 번 뚜안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한국의 활동가들이 계속 애써주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던 뚜안의 죽음에 우리가 함께 슬퍼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닫게 됐다. 법무부가 처음으로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죽음에 공식적으로 사과할 수 있던 이유도. 이 투쟁은 유가족과 활동가들이 같은 마음으로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 스스로 연 것이기 전에, 뚜안이 열어준 길이었다. 그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기에. 이 투쟁이 여기까지 왔구나. 앞으로도 먼 길을 가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섬네일 출처: 혜연(김용균재단)